4월 7일 섭노티카 2의 스팀·에픽·Xbox 스토어 페이지에서 크래프톤 표기가 사라졌다. 자리에는 개발사 언노운월즈가 퍼블리셔로 단독 이름을 올렸다. 5억 달러를 들여 산 스튜디오에서 인수자의 이름이 지워지는 일은 드물다. 발단은 미국 델라웨어주 형평법원 판결이다.
사건의 골격
크래프톤은 2021년 언노운월즈를 인수했다. 본 거래 5억 달러에 더해, 2025년 말까지 매출 목표 달성 시 공동창립자 측에 2억 5천만 달러(약 3,400억 원)를 추가 지급하는 어닝아웃 조항을 붙였다. 분쟁의 씨앗이 여기 있었다.
2025년 7월 1일 크래프톤은 공동창립자 찰리 클리블랜드, 맥스 맥과이어와 CEO 테드 길 세 명을 동시에 해고했다. 사유는 "섭노티카 2를 시기상조로 출시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58페이지 분량의 부당해고 소장을 제출했고, 8개월 뒤인 2026년 3월 16일 델라웨어 형평법원의 윌 부법원장은 크래프톤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길은 즉시 복직했고, 어닝아웃 마감일은 9월 15일로 9개월 연장됐다. 다음 날 언노운월즈는 섭노티카 2를 5월 얼리액세스로 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챗GPT가 끼어든 자리
판결문이 흥미로워진 지점은 크래프톤 김창한 대표가 어닝아웃을 피할 방법을 모색한 과정이다. 내부 법무팀이 "정당한 해고 사유가 없어 어닝아웃 지급을 피하기 어렵다"고 보고하자, 김 대표는 챗GPT에 자문을 구했다. 챗GPT가 정리한 '노딜 시나리오 대응 전략'을 토대로 한 달 동안 '프로젝트 X'라는 내부 태스크포스가 가동됐다.
챗GPT 답변이 제시한 단계는 ① 스팀 등 퍼블리싱 권한 회수, ② 팬을 향한 선제 여론전과 허위 공지, ③ 핵심 인력에 대한 법적 압박이었다. 크래프톤은 차례대로 실행에 옮겼다. 길의 데이터 다운로드 행위에는 영업비밀 유출 혐의를 걸었고, 공동창립자들에게는 미승인 프로젝트 진행을 사유로 추가했다.
법원은 두 주장을 모두 기각했다. 윌 부법원장은 "크래프톤은 창립자들의 역할 축소를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이를 뒤늦게 해고 사유로 삼을 수 없으며, 데이터 다운로드는 크래프톤의 부당한 스튜디오 장악 시도에 맞서 작업 성과물을 방어하기 위한 선의의 조치였다"고 판시했다. 챗GPT 자문 기록은 김창한 대표의 의도성을 입증하는 물증으로 채택됐다.
컬리스토 프로토콜에서 시작된 패턴
크래프톤의 해외 스튜디오 관리에서 균열이 드러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9년 인수한 스트라이킹 디스턴스 스튜디오의 데뷔작 '컬리스토 프로토콜'은 1억 6,100만 달러를 투입하고도 첫해 판매 200만 장에 그쳤다. 사전 목표였던 500만 장의 절반에도 못 미친 결과였다.
2023년 8월 1차 32명 정리해고가 단행됐고, 한 달 뒤 스튜디오 헤드 글렌 스코필드가 사임했다. 2024년 10월 출시한 신작 '리댁티드'는 스팀 동시접속자 168명을 정점으로 사실상 시장에서 사라졌다. 2025년 2월 2차 정리해고는 사내에서 "대부분의 개발자"가 정리됐다는 관측이 나왔다.
스트라이킹 디스턴스 케이스가 흥행 실패에 따른 통상적 구조조정이라면, 언노운월즈 케이스는 인수 당시 합의한 어닝아웃을 사후에 회수하려 한 정황이 법정 기록으로 남았다. 두 건 모두 크래프톤이 해외 자회사를 본사 의사결정 흐름에 편입하려는 과정에서 마찰이 빚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 게임사의 글로벌 M&A 시험대
배틀그라운드 단일 IP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크래프톤이 택한 길은 해외 스튜디오 인수였다. 그 이력의 한쪽 끝에서 컬리스토 프로토콜의 흥행 부진이, 반대쪽 끝에서 언노운월즈 분쟁이 만났다. 펄어비스가 자체 IP인 붉은사막을 출시 4주 만에 500만 장으로 끌어올린 같은 분기에, 크래프톤은 5억 달러로 산 스튜디오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장면을 받아들이게 됐다.
해외 스튜디오와의 인수 후 통합(PMI) 실패는 한국 게임 산업의 글로벌 확장 모델에 던지는 질문을 키웠다. 어닝아웃 분쟁은 크래프톤만의 문제가 아니다. 엔씨소프트, 넷마블, 스마일게이트 등 다수의 한국 퍼블리셔가 비슷한 구조의 해외 인수 계약을 안고 있다. 이번 판결이 향후 협상 테이블에서 인용될 여지가 있다.
크래프톤이 항소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 다만 챗GPT 자문 기록과 '프로젝트 X' 메모가 이미 공개된 마당에 부당해고 자체를 뒤집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9월 15일까지 섭노티카 2 얼리액세스가 어닝아웃 기준을 충족하면 크래프톤은 5억 달러 인수 위에 추가로 2억 5천만 달러를 지급해야 한다. 인수자가 인수 가격을 가장 부담스럽게 받아들이는 시점이 인수 5년 차에 도착했다.




